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텔레 산타나 (문단 편집) ===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1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8-09-17 10.41.25.jpg|width=100%]]}}} || 1980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부임한 산타나는 브라질을 월드컵 본선에 가볍게 진출시켰다. 이후 그는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브라질 축구 역사에 길이남을 '''황금의 4중주'''를 결성한다. [[지쿠]], [[소크라치스]], [[토니뉴 세레주]], [[호베르투 팔캉]]이 바로 그 멤버였다. 이들의 면면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atic.dnaindia.com/342617-zico.jpg|width=100%]]}}} || 1. [[지쿠]]는 통칭 '''하얀 [[펠레]]'''라고 불린 인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서 엄청난 득점 기록을 쌓아올렸고[* 클럽 통산 697경기 475골, [[A매치]] 72경기 52골]경기를 읽는 눈이 예리할 뿐더러 "발에 레이더가 달렸다"는 찬사를 들을만큼 정교한 킥으로 수비 허점을 노리고 길고 짧은 패스를 자유자재로 뿌려 역대 최고의 공미라는 찬사를 받았다. 또한 [[프리킥]]도 매우 잘 차서 통산 101골(비공식 기록)을 달성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드리블, 패스, 슈팅을 모두 갖춘 브라질의 [[판타지스타]]였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thesun.co.uk/Socrates_350x475_909220a.jpg|width=100%]]}}} || 2. [[소크라치스]]는 1980년대 세계를 풍미한 [[슈퍼스타]]로,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특유의 [[곱슬머리]]와 [[헤어밴드]], 턱수염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탁월한 시야를 보유해 경기장 곳곳에 위협적인 패스를 뿌려주는 역할을 했으며, 경기를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게다가 양발잡이에 몸싸움 능력까지 갖추었으며 테크닉도 탁월해 가히 플레이메이커의 정석으로 불릴 만 한 선수였다. 또한 [[의대]] 출신으로 [[의학]] [[박사]] [[학위]] 및 [[전문의]] 자격증까지 보유하였으며 [[철학]] [[박사]] 학위까지 취득할 정도로 [[팔방미인]]이기도 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wanderleynogueira.com.br/cerezo.jpg|width=100%]]}}} || 3. [[토니뉴 세레주]]는 1980년대 세계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그는 강력한 체력, 견고한 수비력, 안정적인 볼 키핑력, 날카로운 패스 능력 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AS 로마]]와 [[UC 삼프도리아]] 소속으로 [[유로피언컵]] 결승전에 두번 출장했으나 아쉽게 우승을 하지 못했다. 또한 자국 리그의 상파울루 소속으로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컨티넨탈컵]] 우승을 달성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44efdac4d3f8e2d118fc82551961abeb.jpg|width=100%]]}}} || 4. [[호베르투 팔캉]]은 1970~1980년대 브라질과 [[세리에 A]]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서 명성을 떨쳤다. [[인테르나시오나우]]에서 1973년부터 1979년까지 활동하며 브라질 세리에 A 3회 우승(1975년, 1976년, 1979년)과 198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준우승에 기여했으며 1980년 세리에 A의 [[AS 로마]]로 이적한 후 5년간 활동하면서 세리에 A 역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하나로 거론될 정도로 최고의 활약을 선보였다. 엄청난 테크닉, 왕성한 활동량, 훌륭한 축구 지능을 기반으로 한 그의 탁월한 경기력은 AS 로마 팬들을 경탄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는 AS 로마에서 세리에 A 1회 우승(1983년)과 [[코파 이탈리아]] 2회 우승(1981년, 1984년)에 기여했다. 잘 알려져 있듯 현시대의 콜롬비아 스트라이커 [[라다멜 팔카오]]의 이름은 이 인물에게서 따온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ootballsgreatest.weebly.com/7391447.jpg|width=100%]]}}} || 산타나는 이 4명의 미드필더들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이른바 4-2-2-2 전술을 도입했다. 전방에 투톱을 세우고 공미 자리에 [[지쿠]]와 [[소크라치스]], 그리고 중원에 [[토니뉴 세레주|세레주]]와 [[호베르투 팔캉|팔캉]]을 배치했다. 그 결과 4명의 선수들은 중앙에서 탁월한 볼 컨트롤과 환상적인 패스워크를 보여주며 상대팀이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고 쉴새없이 몰아붙였다. 브라질은 이들의 활약을 앞세워 조별 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한 소련, 스코틀랜드, 뉴질랜드를 모조리 격하하며 3전 전승으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그런데 2라운드에서, 브라질은 사상 최악의 조에 속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와 한 조에 속한 것이다. 이들 모두가 월드컵 우승을 경험하였고 아르헨티나는 디펜딩 챔피언에 브라질은 우승 3회, 이탈리아는 우승 2회를 기록, 세 나라 모두 월드컵 우승 후보로 손꼽혔다. 이 세팀의 혈투 끝에 [[디에고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가 이탈리아에게 2-1로 패한 후 브라질에게 3-1로 패해 2패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탈리아와 브라질의 진검승부. 결과는 (브라질의 입장에선 하필 이날 일생일대의 맹활약을 펼친) [[파올로 로시]]의 해트트릭을 앞세운 이탈리아가 3-2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를 지켜본 브라질 팬 2명이 자살하고 5명이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등, 브라질 사람들은 석패에 깊이 슬퍼했다. 이를 '''데 사리아 참사'''라고 한다. 하지만 32년전에 있었던 [[마라카낭의 비극]]과 32년 후에 있을 [[미네이랑의 비극]]과는 달리, 이 패배의 주인공인 선수들과 산타나 감독은 브라질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그들은 비록 지긴 했지만 아름다운 축구를 구사하며 브라질의 정신을 지켰다는 호평을 받았고 마침 이 월드컵에서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히혼의 수치]]라고 명명될 정도로 비겁한 경기를 치룬 것과 비교되어 "저렇게 더럽게 이기느니 정정당당하고 아름답게 승부하다가 패하는 게 낫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됐든 브라질이 2라운드 진출에 그친 것은 사실이었기에, 산타나는 책임을 지고 사임을 선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